노변동 사직단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 16호
주소: 수성구 노변동 407-4번지 일원
사직단은 토지를 주관하는 사신과 곡식을 주관하는 신인 직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종묘와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시되어 국가의 다른 명칭으로 ‘종묘사직’이라고도 한다. 예 문헌에서도 국가의 안위를 표현할 때는 ‘사직이 위태롭다’라고 하며 정부중신을 사직지신이라고 표현하였다.
노변동 사직단은 조선시대 지방 사직단 중의 하나인 옛 경산현의 사직단으로 ‘경산현읍지’ 및 지방지도 등 문헌상으로만 확인되다가 시지택지개발지구의 남쪽 경계를 동서로 지나는 유니버시아드로가 개설되면서 실시된 발굴조사(1999.2.1~2000.8.28)결과 그 모습이 다시 드러나 조선시대 지방 사직단의 구조와 규모 등을 밝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사직단과 더불어 발굴된 삼국시대 대규모 고분군인 노변동 고분군에서 조사된 수백기의 유구와 만여점의 유물은 삼국시대 고산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렇듯 노변동 사직단은 조선시대 사직단과 삼국시대 고분군이 시대를 달리하여 조성된 복합 유적인 만큼 과거 이지역의 문화상을 알수 있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로서, 이러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노변동 사직단과 고분군을 복원 정비하게 되었다.
노변동 고분군 유적
노변동 고분군은 인근의 욱수동, 시지동 고분군과 함께 시지지구에 위치한 삼국시대 대규모 고분군으로 삼국시대 덧널무덤 (목곽묘) 98기, 돌덧널무덤(석곽묘) 606기, 웅관묘 37기 등 총 741기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토기류 8800여점과 철기류 1600여점이 출토되엇으며 그 외 장신구류 등 모두 10,000여점이 넘게 출토되었다. 특히 돌덧널무덤 473호에서는 당시 지방의 지배자 신분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금동관 1점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여기 전시되어 있는 고분은 노변동 고분군 돌덧널무덤 427호, 428호로 구덩이를 파서 돌덧널을 쌓고 그 위에 흙으로 봉분을 쌓은 무덤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현재 전시되어 있는 고분 내부의 유물들은 발굴 당시 출토되었던 유물의 복제품으로서 발굴되었던 상태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노변동 고분군의 발굴조사 기록
발굴조사는 시지택지개발지구의 남쪽 경계를 동서로 지나는 대구삼덕동~시지택기간 도로건설계획에 따른 사전 조사로 이루어졌다. 발굴조사 기간은 1999년 2월1일부터 2000년 8월 28일까지, 해당면적은 25,000㎡를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삼국시대 대규모 고분군과 조선시대 사직단 유적이 발굴됨으로써 유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당초의 도로개설계획을 변경하여 유적을 원상보존하게 되었다.
노변동 고분군의 발굴 성과와 의의
이 일대에 위치한 노변동 욱수동, 시지동 고분군의 발굴조사에서는 삼국시대 고분군 단일유적으로는 최대규모의 유구수가 조사되었고, 국내외에 중요한 고고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과거 삼국시대 시지지구의 문화상을 밝히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
노변동 고분군의 위치와 범위
대덕산에서 북쪽을 가장 길게 뻗어 있는 능선의 말단부에 위치하며 현재 월드컵대로에 의해 절개되었지만 그 능선이 이어지는 곳에 삼국시대 고분이 조성되어 있다. 이 일대 욱수동, 시지동고분군이 있으나 행정구역으로 구분되기 전에는 하나의 고분군이었으며, 현재까지 발굴조사된 분묘의 수는 천여기에 달하여 당시 시지지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노변동 고분군 출토유물
노변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굽다리접시, 짧은 목항아리, 손잡이 항아리, 굽다리목긴항아리, 손잡이잔, 굽다리사발, 사발 등을 비롯한 토기류 8,800여점과 쇠낫, 큰칼, 화살촉, 쇠방울, 미늘쇠, 꺽쇠와 같은 철기류 1,600여점이 출토되었으며, 그 외 금동관, 귀걸이와 같은 장신구류를 합해 모두 10,000여점이 넘게 출토되었다.
노변동 사직단 유적
노변동 사직단 유적은 과거 경산현의 사직단이다. 발굴조사에 의해 밝혀진 노변동 사직단의 구조는 사직신을 모시는 제단시설, 제단을 보호하는 담장 등이 확인 되었으며, 기초단의 아랫부분 규모는 장축 24m, 단축이 16m 정도이며 높이는 130~180m정도이다. 기초단위에 유시설이라 불리는 담장을 쌓았으며 그 내부에 하나의 제단을 설치하였다. 도성의 사직단과 달리 지방의 사직단은 사단과 직단을 합쳐서 하나의 단을 두었기 때문에 제단은 하나이다. 출입문 중 북쪽의 문이 폭 103cm정도로 좁은 특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북쪽의 문이 북신ㅁㄴ이라 불리는 문헌기록과 같이 신을 위한 문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노변동 사직단은 발굴조사에 의해 확인된 바에 의하면 조선시대 전기에 조성한 후 한차례의 보수와 개축을 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보원 정비된 사직단은 2차 조성분 원형대로 하부구조를 보존하였으며, 상부 구조물은 과거 문헌기록을 바탕으로 조선시대의 사직단 형태로 복원한 것이다.
사직단의 의미
사직단은 토지를 주관하는 신인 사와 곡식을 주관하는 신인 직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우리 조상들은 조선시대부터 도성을 건설할 때 궁권 왼쪽엔 종묘를 오른쪽엔 사직단을 두었다. 또한 사직의 중요성르 감안하여 지방의 주요 지역에 사직단을 설치하여 제를 올렸다.
노변동 사직단의 발굴조사와 복원
사직단은 발굴조사에 의해 확인된 바에 의하면 조선시대 전기에 조성한 수, 한 차례의 보수와 개축을 하였던 것을 밝혀졌다. 2차에 조성된 사직단은 처음에 비해 동서 길이가 더 길어지고 제단도 북쪽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현재 사직단의 복원은 발굴조사에서 밝혀진 자료 중 2차로 조성된 것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구체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영남문화제연구원의 발굴조사성과와 문헌의 기록을 토대로 하였다.
사직제의 의미
사직제는 궁중제사 가운데 대사에 속하며 사직대제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사직제가 종묘대제와 더불어 국태민안을 기원했던 중요한 예식이었으며, 그 절차와 예물, 복장, 음악 무용 등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사직제는 매년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날 밤에 거행되었는데, 1908년 순종 2년 일제의 강압으로 폐지되었다. 현재 사직제는 1988년 복원되어 매년 개천절에 서울 사직동 사직공원의 사직단에서 거행되고 있다.
도성의 사직단
도성(서울)의 사직단은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1-28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 121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도성의 사직단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수도를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함께 만들었다. 좌묘우사의 제도에 따라 경복궁 동쪽엔 종묘를 서쪽엔 사직단을 배치하고 태조 4년(1395년)정월부터 공사를 착수하였다.
유적지 이용안내
유적지는 시민 모두가 다양하게 이용하는 곳으로서
스스로 질서를 지켜 쾌적하고 깨끗한 문화체험 및 휴식공간으로 보존합시다.
-시설물을 보호하고 취사 및 음주를 하지 맙시다.
-시설문(사직단, 전시관 등)에 올라가지 맙시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맙시다.
-고성방가, 음주 등은 다른 이용자에게 불쾌감을 줍니다.
-애완동물(개, 고양이 등)을 데리고 출입하지 맙시다.
-안전사고가 생길 수 있는 놀이는 하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