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구스토리텔러

수성못을 내려다보고 싶었던 일본인-미즈사끼 린따로( 水崎林太郎)와 수성변 갤러리

감나무임 2015. 2. 21. 12:44

 

대구 수성구에 지금은 휴양 위락지로 유명한 수성못이 있습니다~

이 수성못과 관련된 인물로 미즈사끼 린따로( 水崎林太郎)란 인물을 들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문서에는 수성못을 축조한 인물로 소개되어 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개척농민으로 대구에 정착한' 인물로,

농지개선을 위해 필요한 수성지를 일본총독부에 건의하여 증축한 인물이죠.

아울러 수리조합을 설립하고, 주변에 농사를 짓는 논 밭에 물을 대 주고 관리비를 받는 수리조합장을 죽을 때까지 운영하면서, 일본의 최 전성기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에서 온갖 혜택을 누리다가 해방되기 전, 아마도 일본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고 사망하였기 때문에 애착이 깃든 수성못을 바라다보는 곳에 한국식 무덤을 쓰라고 유지를 남겼던 인물이지 않을까 합니다~

 

수성못 법이산 방향에 오리학교주차장으로 통하는 길을 죽 따라 올라갑니다.

 

사단법인 한일교류회에서 관리하였으나, 협회 회장이 2014년 5월에 사망한 이후, 전반적인 관리는

'수성구청' 문화체육부에서 맡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외부에서 묘소 참배를 한다하면 사람을 보내 주변 청소를 깨끗하게 하니 말이죠~

 

간혹 미즈사끼 린따로씨의 묘소를 참배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나봅니다~^^

 

'부산일본문화연구센터자료'에 의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수성못은 옛 둔동제,
세종조 「경상도지리지」에 나와…

수성못은 대구시민들에게 1924년 일제가 수리조합비를 거둬 들일 목적 하에 만든 못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수성못은 조선조부터 있어 왔던 것임을 세종조 「경상도지리지」(けい尙道地理ちり)와 예종조 「경상도속찬지리지」(けい尙道ぞくせん地理ちり)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수성못’에 대한 최초의 문서인 세종의 「경상도지리지」(けい尙道地理ちり)을 살펴보면, 대구군에는 4개의 큰 수리지(水利すいり)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중 둔동제(たむろほらつつみ)라 불리는 것이 지금의 수성못이다.

4개의 수리시설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 ふつじょうつつみ(현 배자못, 소출 양 64결)
(2) がまつつみ(현 동촌, 소출 양 52결)
(3) 聖堂せいどうつつみ(현 성당못, 소출 양 48결)
(4) たむろほらつつみ(현 수성못, 소출 양 21결)

그리고, 예종 원년(1468년), 대구군에 18개의 수리지(水利すいり)를 더 축조하여 총 22개가 되었다.

 이 내용은 「세종실록지리지」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 1469년에 만든「경상도속찬지리지」에도 나와 있다.

이는 당시 조선조가 쌀 농사를 중시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조조 43~47년 사이에 편찬된 읍지중에 하나인 「대구읍지」(大邱たいきゅう邑誌)에 ‘둔동제’가

수동(현 범물동 일대)에 있다고 나와있다.

둔동제는 둘레가 1,429척이고 수심이 7척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대구읍지 번역판은 1997년 김택규·박대현 편역으로 대구광역시에서 발행하였다.

이후, 일제가 1924년 5월에 수성수리조합을 만들고, 수성못을 증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부사」에서도 수성못이 이전부터 있어 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수성못에 대해 “옛 수성현 동문산리 소재, 현 달성군 수성면 상동 수성저수지”라고 서술되어 있다.

미즈사키린따로는 일제시대 대구지역 관개용수 확보를 위한 저수지를 조성하는 등

지역의 농업 발전을 위해 크게 공헌한 인물로 묘소는 고인의 뜻에 따라 저수지 옆에 만들어졌다.

 

 

 

 미즈사키 히로시씨는 미즈사끼 린따로 씨의 손자였고, 일제강점기 이후 고국인 일본으로 돌아가 대구를 그리는 수필집을 펴 냈어요~<그리운 대구, 추억의 사람들>  일본어 판이 있길래 번역해 봤습니다만, 원본 자료를 제대로 수집하지 못해서...

해석판이 그닥 매끄럽진 못하네요~^^

 

일제시대 저자의 조부가 바로 수성못을 농업용 관계수로로 1924년 만들었다는

미즈사키린따로 水崎林太郎 씨의 손자다.

일본강점기 초기에 대구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온 것에 대해 회상하며 적은 글이다.

식민지시대 일본소시민의 잔잔한 대구생활이 적혀있고 의미있는

대구 농원사진, 사과밭 등이 나와있어 눈여겨볼 만하다. 소중한 기록들이다.

저자는 대구 봉산소학교(현 경대사대부초)에 다녔다.

몇가지 중요한 사실은

미즈사크린따로가 단독으로 경북지사에 직언해 공사비를 받았다고 하나 그의 손자의 기록에는 수성구의 1, 2를 싸우는 대지주였던 서수인徐寿仁이란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1887년 생으로 린따로보다 20년 정도 나이가 어리지만 서수인과 힘을 협력하여 못을 만들었으며 평생 벗삼았고, 교제했다고 한다. 또한 서수인徐寿仁의 3째 아들 서창교(1932년생)는 대구에 남은 린따로의 무덤을 계속 지키고 있다고 한다.

<그리운 대구, 추억의 사람들> 미즈사키 히로시 (기후시,1935 년생)

水崎弘三(岐阜市、1935年生)

大邱 ・水崎農園の全景。自宅を中心として約500m四方(1940年ころ)

대구· 미즈사키(부친)농원의 전경.자택을 중심으로 약500 m사방(1940 )

私は昭和10年(1935年)、今の韓国、大邱(テグ)市で生まれました。祖父は大邱に巨大な農業用貯水池(寿城池)を築いて、荒野を美田に変えた水崎林太郎(岐阜出身)、父はその長男で篤農家といわれた元(はじめ)でした。父は広大な水崎農園を経営し、花や野菜、リンゴの栽培から米作り、麦作りまで手を広げていました。

 元の三男坊に生まれた私は、広々とした自然の中で自由に遊びまわり、伸び伸びと育っていきました。幼い頃の暮らしを想い出してみようと目をつむるといつも瞼の裏いっぱいに色とりどりの花の群落が浮んできます。目にも鮮やかなチューリップの赤や白、香り高く揺れるのは黄色や紫の大輪の菊、花に囲まれた本当に楽しい日々でした。

저는 소화10년(1935년), 지금의 한국 대구시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대구에 아주 큰 농업용 저수지(수성지)를 축조하고, 황폐한 땅을 옥답으로 바꾼 미즈사끼 린타로(기후출신)이고, 아버지는 그의 맏아들로써 착실한 농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주 큰 미즈사키농원을 경영하고, 꽃, 야채, 사과 재배부터 벼농사 보리농사까지 손을 댔습니다.

셋째아들로 태어난 나는 넓은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놀며, 잘 컸습니다. 어릴 적 생활을 추억해 보려고 눈을 감으면 언제나 한가득 형형색색의 꽃의 군락이 떠오릅니다. 붉고 흰 튤립, 향이 좋은 황색 자주색의 송이가 큰 국화가 아른거리고, 꽃 밭에 둘러써인 정말 즐거운 날들이었습니다.

<사진>

左側は父の一番下の叔母です。今90才です。伏見にいます。父自慢のチューリップ畑でいつも弟の五美と花畑で遊んだ

왼쪽은 아버지의 맨 밑 숙모입니다. 지금은 90세이죠. (쿄토)후시미에 살고계십니다. 아버지가 자랑하시는 튤립밭에서... 늘 남동생인 이쯔미와 꽃밭에서 놀았다.

 耳の中には、花畑でいつも一緒に遊んでいた弟の五美(いつみ)の笑い声がかすかに甦ってきます。

 後から聞いた話ですが、当時、水崎農園で栽培された生花は韓国内だけでなく、遠く満洲の(今の中国東北部)にまで送られていたそうです。

 今から65年も昔に、多彩かつ大量の花の栽培に成功していた父の努力を思うと、我ながら自然に頭が下がってきます。

 さて花をはじめ、リンゴや米まで作っている水崎農場ですから、韓国の農民の人たちが(農作業を手伝うために)、たくさん通ってきていました。

 街で花屋を営んでいる韓国人の花屋さんたちも毎日、花の買い付けにやってきます。

귓속에는, 꽃밭에서 언제나 함께 놀던 남동생 이쯔미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당시 , 미즈사키 농원에서 재배된 생화는 한국내 뿐만이 아니라, 멀리 만주(지금의 중국 동북부)까지 보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65이나 전에, 다채롭고도 많은 양의 꽃 재배에 성공했던 아버지의 노력을 생각하면, 나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또 꽃을 비롯해서 사과, 쌀농사까지 했던 미즈사키 농장이기 때문에, 한국인 농민들이(농사일을 돕기 위해서), 많이 다녔습니다.

 거리에서 꽃집을 하던 한국인의 꽃가게 주인들도 매일, 꽃을 대량으로 사러 옵니다.

 みんな顔なじみですから顔を合わせると「おはよう!」とか「そこに鎌があるから気を付けて!」とか声をかけてくれるのでした。

 祖父が骨身を削る思いで造り上げた寿城池(6万坪の広い池でした)は我が家から南へ500mほど離れた所にありました。

 祖父の林太郎は、その池の辺りに治水事務所を建て、そこで寝泊りしていました。

 よほど寿城池や周囲の水田の管理に神経を使っていたのでしょう。滅多に息子や孫の住む家に顔を見せ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

 そのせいか、小さかった私は当然にしても、2人の兄たちまで「林太郎おじいさんの顔は、よく思い出せない!白い髭だけは覚えているんだが…」という有様です。

  모두 낯익은 사이이기 때문에 만나면 「안녕!」이라든가「거기에 낫이 있으니까 조심해!」라고 말씀들 해 주셨죠.

 할아버지가 가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시킨 수성못(6만평짜리 넓은 못이었습니다)은 우리 집에서 남쪽으로 500 m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인 미즈사키린따로(水崎林太郎)는 그 못의 근처에 치수 사무소를 세워 거기서 묵었습니다.

 거의 수성못이나 주변 논의 관리에 신경 썼겠지요. 좀처럼 아들이나 손자가 사는 집에 얼굴을 보이는 일은 없었습니다 .

 그 때문인지, 어렸던 나는 당연할지 모르나, 2명의 형들까지도 「린따로 할아버지의 얼굴은, 잘 생각해 낼 수 없다! 흰 머리만 기억하고 있는데…」라는 정도입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꽃밭에서 아이들의 사진을 찍었다-

家人とは余り接触なく暮らしていた祖父は、逆に、韓国の人たちと濃密なつきあいをしていたようです。

 特に寿城地区で一、二を争う大地主だった徐寿仁(ソ・スイン1987年生)さんとは寿城池や水田を力を協せて造った終生の友として、交際していたと聞きました。

 この徐寿仁さんの三男にあたる方が、今も林太郎の墓を守り続けておられる徐彰教(ソ・チャンギョ1932年生)さんで、ロータリーの会長や韓日親善交流会の会長を歴任されている方です。

집 식구들과는 별로 접촉없이 생활했던 할아버지는 거꾸로 한국인들과는 아주 깊이 사귀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수성지구에서 첫째, 둘째가라하던 대 지주였던 서수인(1887년생)씨와는 수성못과 논을 힘을 합해 축조했던 평생의 친구로서 교제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서수인씨의 셋째아드님이 지금도 린타로 할아버지의 묘를 계속 돌봐주고 계시는 서창교(1932년생)씨이며, 로타리클럽 회장과 한일친선교류회 회장을 역임하시는 분입니다.

 林太郎(1868年生)は、自分より20才近く若い徐寿仁さんと兄弟のように親しく交わり、何くれとなく相談しながら寿城池を完成させ、さらにその水で荒野を250万坪をこえる一望の美田に変えました。

 林太郎は満々と水を湛えた寿城池の堤に柳の苗木を植えました。きっとこの柳も徐寿仁さんと語り合いながら植えていったのでしょう。

 当時の柳の木は殆ど枯れてしまいましたが、2本だけは巨大な姿を湖面に写し、林太郎と徐寿仁さんそして周辺の農民たちの夢を今に伝えています。

린타로(1868년생)할아버지는 자기보다 스무살이나 어린 서수인씨와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면서 뭐든 같이 의논하면서 수성못을 완공하고 또 그 못물로 250만평에 달하는 넓은 황페한 들을 옥답으로 변화시켰던 겁니다.

할아버지는 물을 가득채운 수성못 제방에 버들묘목을 심었습니다. 아마 버들도 서수인씨와 서로 의논해서 심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버드나무는 거의 죽어버렸지만, 두 그루만은 장대한 모습을 호수수면에 비추며, 할아버지와 서수인씨 그리고 주변의 농민들의 꿈을 지금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さて、私は敗戦で日本に引き揚げる前の4年間は、町の中心部にある鳳山小学校に通いました。今の大邱の地図で鳳山文化通りとあるあたりでした。

 小学校の隣には師範学校もあり、大邱の教育の中心地といえたでしょう。我が家から学校までは何と5キロもあり、小柄な小学生には大変遠い道のりだったはずですが、全く苦しいと思った記憶はありませんでした。

또 나는 패전(해방)으로 일본에 돌아오기 전 4년 동안, 동네 중심에 있던 봉산소학교에 다녔습니다. 현 대구지도에서는 봉산문화거리 부근이였습니다. 초등학교 옆에는 사범학교도 있고, 대구교육의 중심지였습니다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집에서 학교까지는 아마 5Km 정도이고 몸집이 작은 초등학생한테는 상당히 먼 거리였을 터이지만 정말 힘들었다는 기억은 없습니다.

 兄や弟も一緒ですし、通学路の左右にはリンゴの白い花が美しく咲き乱れているのです。日本の信州のリンゴ畑の風景を思い起して下さい。

 爽やかな風が吹き抜ける中、友だちの農園で貰ったリンゴをがりりと噛んだあの味、あの感触、懐かしさがこみ上げてきます。

 ある年の夏のことです。母が私と弟の五美(いつみ)を大邱の夜祭りに連れて行ってくれました。街に着くとランプを灯した屋台が並び、黄色や赤いシロップをかけた氷やワタあめを売っていました。

형과 동생과 함께였고 통학하는 길 좌우에는 사과의 흰꽃이 아름답고 흐드러지게 피어있었습니다. 일본의 신주에 있는 사과밭 풍경을 생각해 보세요. 상쾌한 바람이 불고 친구의 농원에서 받은 사과를 와삭 베 물었을 때의 그 맛, 그 감촉, 그리움이 솟구칩니다.

 子ども達が線香花火や金魚すくいをしながら大声を上げています。水で冷やした美味しそうなスイカを売っていたので、一部分を切り取ってもらい味見をしました。

 甘く熟した赤いスイカでした。さっそく残りを丸ごと買って皆で食べましたが、母の笑顔とあの味は忘れられません。

친구들이 모깃불놀이와 물고기를 잡이를 하면서 소리를 질러댑니다. 찬물에 식힌 맛있는 수박을 팔았기 때문에 한조각을 얻어 맛보았습니다. 달게 잘 익은 빨간 수박이었습니다. 바로 나머지를 돈을 주고 사서 모두 모여 먹었습니다만, 어머니의 웃는 얼굴과 그 맛은 잊을 수없습니다.

 あの夜、遊び疲れた私たちはリヤカーに乗せられ家に帰ってきましたが、寿城池の上から見上げた明るく輝く月の姿もしっかり記憶に残っています。あの時、リヤカーの上から一緒に月を見上げた弟の五美(いつみ)は、残念なことに2003年に亡くなってしまいました。

 冬の楽しみは、正月を前に、家で働いている人達、全員が集って盛大に行う餅つきでした。男衆は老いも若きも参加して交代で餅をつきます。一方女性は振り下される杵の間の僅かな時間に餅をみごとに裏返します。いつまで見ていても倦きませんでした。

그날 저녁엔 놀다지친 우리들이 리어카를 타고 집에 돌아왔는데, 수성못 위에서 올려다본 밝게 빛나는 달빛도 가득히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그 때 리어카위에서 함께 달을 봤던 동생 이츠미는 안타깝게도 2003년에 타계하였습니다.

겨울의 즐거움은 설맞이로 집에서 일하던 사람들 모두가 모여 성대히 치렀던 떡메치기였습니다. 남자들은 늙고 젊고간에 모두 모여 교대로 떡메를 쳤습니다. 한편 여자들은 내려친 절구공이 질 사이 짧은 시간에 멋들어지게 떡을 뒤집습니다. 언제까지나 봐도 질리지 않았습니다.

 つき上がった柔らかい餅には、小豆のアンコや黄粉などをまぶして皆で食べるのですが、その瞬間には、皆が皆、一人残らず幸せそのものといった表情になりました。

 この日は、座敷一面に、あんころ餅、豆餅、それに朝鮮餅(トック)等々、たくさんつき並べ、それを最後に皆で分けあって持ち帰ってもらいました。

바로 만든 부드러운 떡에는 콩가루 속과 콩고물을 묻혀 모두모여 먹습니다만, 그 순간에는 모두가 (한사람도 빠짐없이) 행복 그 자체의 표정이 됩니다.

이날은 자리 한쪽에 팥떡, 콩찰떡 또, 조선떡 등등 많이 진설하고 마지막으로 모두 떡을 나눠서 집에 가지고 갑니다.

そして、いつしか運命の年、昭和20年(1945年)の8月がやってきました。私は或る日、急に親たちに呼ばれて姉の千恵も一緒に寿城池のほとりにある祖父、林太郎の墓参りに行くことになりました。寿城池までの道の両側には一望の水田が広がり穏やかな雰囲気が漂っていました。改めて見た林太郎の墓は、見慣れた日本風の墓石ではなく韓国風の土を丸く盛り上げた形をしていました。私は親に言われるまま夏草の茂った祖父の墓に手を合わせて頭を下げました。

 ずっと後になって、その日が8月15日で日本の敗戦が決った日だったことを教えられました。

 それから、しばらく一家が日本に引き揚げる日まで、農園で働いていた韓国の人たちが交代で家を守りに来てくれました。街の中では嘘か本当か分かりませんでしたが、焼き打ちにあった家も出たという噂が流れていたからです。

 まもなく私たちは、大邱から日本に無事に引き揚げてきました。祖父水崎林太郎が夢の実現のために大陸に渡ってから30年の歳月が経っていました。 

 그리고, 어느덧 운명의 해, 쇼와20년(1945년) 8월이 다가왔습니다. 나는 어느날, 갑자기 부모님께 불려가서 누나 치에와 함께 수성못 부근에 있는 조부, 린따로 무덤에 가기로 했습니다. 수성못까지의 길양편에는 널리 논이 펼쳐지고 온화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다시 본 할아버지 미즈사키 린타로의 무덤은, 눈에 익은 일본식의 묘석은 아니고 한국식으로 흙을 둥글게 북돋운 형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부모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여름풀이 우거진 조부의 무덤 앞에서 손을 모으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훗날, 그 날이 8 월15일이고 일본의 패전이 결정된 날이었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식구들이 일본에 돌아오는 날까지, 농원에서 일하고 있던 한국의 사람들이 교대로 집을 지키러 와 주었습니다. 거리에는 거짓인지 사실인지 몰랐습니다만, 불 탄 집도 있었다고 하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였습니다.

 곧 우리는, 대구에서 일본으로 무사하게 돌아왔습니다. 조부 미즈사키 린타로는 꿈의 실현을 위해서 대륙으로 건너가 3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岐阜に帰ってきた父は開拓への夢を捨てませんでした。各務原飛行場の東に広がっていた旧日本軍の演習地が開拓地として払い下げられたため、各務原の三ツ池地区に入植し、ゼロから再スタートしたのです。兄や姉たちも手のひらに豆をつくりながら、原野に開墾の鍬を振るいました。私と弟は、まだ小学生だったので岐阜市内の新関の家に厄介になっていましたが、土曜の午後から日曜日にかけては三ツ池に行き、子どもながらも開墾の手伝いをしました。

  (일본)기후로 돌아온 아버지는 개척에의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카카미가하라 비행장 동쪽에 펼쳐진 구일본군 연습지를 개척지로 불하받았기 때문에, 카카미가하라의 미츠이케 지구로 이주 해서, 원점에서 다시 시작 했습니다. 형과 누나도 힘을 보태어, 벌판을 일구었습니다. 나와 남동생은, 아직 초등 학생이였기에 기후시내에 있는 니이제키 집에서 지냈습니다만, 토요일의 오후부터 일요일은 미츠이케에 가서, 농사를 도왔습니다.

 

 やがて父は汗にまみれて開いた農場で再び花の栽培を手がけ始めます。そして、ようやく経営が安定してきた昭和20年代の終わりころだったと思います。父が大邱から持ち帰って来た写真帳を口数少なく見せてくれました。父の自慢の花畑の中ではしゃぎ廻っている私と五美の写真が目につきました。 あの広大な農園を全て捨て、無一物で引き揚げてきた父にとって、写真の風景が豊かで幸せそうであればあるほど、見るのが辛かったことでしょう。そのあとになっても両親共に、大邱の時代のことを多く語らぬまま、世を去って行きました。

곧 아버지는 땀으로 가꾼 농장에서 다시 꽃 재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경영이 안정된 쇼와20년대의 후반 무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대구에서 가지고 온 사진첩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자랑이였던 꽃밭에서 까불며 뛰고 놀던 나와 이츠미의 사진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광대한 농원을 모두 버리고 빈털터리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있어서, 사진의 풍경이 윤택하고 행복해 보이면 보일수록, 보는 것이 괴로웠을 테지요. 그 후에도 부모님 모두, 대구에 살았던 때를 그다지 많이 이야기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その後、私は大学のゼミの先生の紹介で、静岡の会社に就職し、18年間サラリーマン生活を順調に重ねました。

 ところが出版会社の社長だった義父が突然に死去し、後を継いだ義兄を手伝う事になり、岐阜に帰りました。いらい、65才までこつこつと勤め上げたあと、悠々自適の生活に入りました。

 今は大陸に夢をはせた祖父や父、そして彼らと共に現地の農業の発展に尽した人たちの事蹟を少しでも残したいと資料の整理に追われています。そして私の命のある限り、祖父や父の思い出がこもった大邱市寿城地区に通い続けたいと念願しています。

 그 후, 나는 대학 세미나 때 만난 선생님의 소개로, 시즈오카의 회사에 취직해 ,18 연간 회사 생활을 순조롭게 해 왔습니다.

 그런데 출판 회사의 사장이었던 장인이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뒤를 이은 처남을 돕게 되어 기후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예순다섯까지 꾸준히 일한 뒤, 퇴직하여 편안한 생활을 하게되었습니다.

  지금은 대륙에서 꿈을 일구었던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그들과 함께 현지의 농업의 발전에 힘을 쏟았던 사람들의 사적을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어서 자료 정리를 부지런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조부나 아버지의 추억이 담긴 대구시 수성구에 계속해 오고가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미즈사끼 린따로씨의 인연으로~ '한국의 일본인'이란 주제로...일본인 들의 관광인파도 간혹!! 기후시의 쥬니어 친선 유도 대회에 참석했다가, 대구시에서 주관하여 방문하게 된 팀 들이 찾아왔어요~  

 

 

 

미즈싸끼 린타로씨의 유지는 수성못을 죽어서도 바라보고 싶었기에 지금의 위치에 무덤을 써 달라했을 텐데...지금은 그 무덤 바로 앞에 높은 빌딩이 가로놓여

수성못을 바라볼 수 없는 아쉬움을 달래야 합니다.

 

수성못은 예전 치수의 목적에서 많이 달라져, 지금은 대구시민의 휴식, 휴양처로 완전 바뀌었죠.

주변의 수성못가 야외 갤러리, 멋진 카페 등등

몇번이고 찾아와도 편히 다녀 갈 수 있는 수성못~!

주변의 변화는 날로 날로~~^^

기대하며 찾아와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