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명재란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 525길 14-21(만촌동 715-1)에 세워져 있는 모명재(慕明齋)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로서 우리나라에 원군으로 왔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에 그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것으로 그의 호인 '그리워할 모(慕)', '명나라 이름 명(明)'자를 써서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두사충은 정유재란 때는 두 아들과 함께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된 뒤 귀화한 후 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일대에서 살다가 계산동으로 옮겼으나, 중국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 밑으로 주거지를 다시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에서 동네이름을 대명동이라 하였다. 그리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을 향해 절을 올렸다 한다.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 기슭에다 그의 묘소를 마련했다. 모명재 앞뜰에 있는 신도비의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가까운 사이가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가지고 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모명재는 네모반듯한 대지 위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모명재가 앞쪽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으로 지어졌으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이고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두고 있다. 부속 건물로 명정각(命旌閣)이 있는데 이 명정각은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의 효행을 알리기 위해 세운 효자각이다. 두한필은 순조 23년(1823)에 태어나 고종 30년(1893)에 생을 마감하였는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런 효행을 알리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 명정각이라고 한다.
모명재 대문 위에 ‘만동문(萬東門)’이라는 하늘 색 바탕에 흰글씨가 보입니다. 이 액자를 편액(扁額)이라고 하는데요, 편액은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이나 문 위에 거는 액자를 말하며 흔히 현판(懸板)이라고도 합니다. 모명재 안에는 다양한 편액들이 걸려 있습니다. 대문에 달려있는 만동문은 ‘백천유수 필지동(百川流水必之東)’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모든 하천은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말로 ‘그 근본을 잊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명을 그리워하여 호를 ‘모명’이라 바꾼 두사충, 그를 모시기 위해 지어진 ‘모명재’, 그리고 근본을 잊지 않겠다는 대문 위의 편액 ‘만동문’, 모두 ‘그리움’이라는 하나의 맥락에서부터 점철(點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명재는 1966년 노후로 인하여 중수가 있었던 건물이지만 그 규모와 구조는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입니다. 재실은 네모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에 좌우 1칸 온돌방, 중앙 대청 2칸, 전면 툇마루, ‘一’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구(架構, 목조건축 짜임새 전체를 일컫는 말)는 무고주(無高柱, 외부 기둥 외에 내부 기둥이 없는 것) 5량가(도리개수를 말함)의 견실한 구조로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로 만들어졌습니다.
가운데 대청 2칸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설치하고, 각 방마다 다른 편액이 걸려있는데요, 왼쪽 방의 ‘경모당(敬慕堂)’은 후손들이 두사충(모명)을 공경한다는 뜻이 담겨있고, 오른쪽 방의 ‘숭정유루(崇禎遺樓)’는 숭정이 남긴 누각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숭정(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를 말합니다.
대청에 붙은 ‘형봉재(兄峰齋)’는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에 묘를 썼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락헌(二樂軒)’에서 ‘이락(二樂)’은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두번째 즐거움에 해당하는 것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락헌’은 하늘과 땅에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당당한 삶을 누리는 집이란 뜻이지요. 거연천석(居然泉石)은 자연에서 편안하게 사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모명재 편액에는 후손들이 지향해야하는 삶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모명재 기둥을 한 번 보세요.기둥에 붙은 시를 ‘주련(柱聯)’이라고 하는데 천천히 한 번 읽어볼까요?
‘복야’는 당시 두사충의 벼슬 이름으로 이 시는 이순신이 두사충에게 쓴 시입니다. 시에서 두 사람의 각별한 우정을 느낄 수 있는데요, 모명재 오른쪽으로 큰 비석이 있는데 이 비석은 두사충의 묘소 앞 비문을 다시 새겨 모명재 뜰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습니다. 신도비는 돌아가신 분의 영혼이 오는 길을 표시하는 비석을 말하는 것인데, 바로 이 비문을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인수가 지어주었어요. 나라의 경계를 넘어선 이들의 아름다운 교우(交友)가 세대 간의 우정인 세교(世交)로 이어진 흔적이라 할 수 있지요.
모명재 오른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5분여 정도만 올라가면 두사충이 잠들어 있는 묘가 나옵니다. 두 번의 전쟁을 치른 장수답게 늠름한 ‘무인석’과 작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문인석’이 묘 양쪽을 지키고 있습니다.그리고 묘지목으로 ‘배롱나무’를 볼 수 있는데요, 배롱나무는 꽃이 백일동안 피고 진다고 해서 백일홍이라고도 불립니다. 배롱나무의 꽃말은 ‘떠나는 벗을 그리워하다’로 고인을 먼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묘지에 잘 어울리는 나무입니다. 또한 나무껍질이 얇아 속이 비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삿된 생각을 하지 않고 청렴하게 살겠다는 선비들의 삶을 상징한다고 하여 향교나 서원에 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보는 배롱나무가 더욱 아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배롱나무는 원래 중국이 원산지에요. 비록 그는 이 땅에 흙이 되었지만 중국에 뿌리를 둔 배롱나무가 그를 한껏 끌어안으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고 있습니다.
두사충 묘에서 왼쪽으로 조금만 가면 그의 7대손인 두한필(杜漢弼)의 묘가 나타납니다. 두한필은 두사충의 7대손으로 조정에서 ‘명정각(命旌閣)’이라는 ‘정려(旌閭)’를 내렸을 정도로 부모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기로 유명하였습니다. 두한필의 묘에는 무인석이 없고 ‘문인석’과 ‘배롱나무’가 그의 잠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두사충과이순신 장군과의우정
두사충과 이순신 장군과의 우정
1597년 정유년, 일본은 휴전을 깨고 다시 조선을 공격했습니다.
정유재란 발발. 두사충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그의 매부(妹夫)이자 수군도독(水軍都督, 수군을 이끄는 지휘관)인 진린(陳璘, 1543~1607)과 함께 다시 조선으로 출병했습니다. 두사충에게 각별한 조선의 친구가 있었으니, 두 번째 조선 출병은 두사충에게 반가운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그 친구와 술 한 잔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다보면 전장에서 새로운 결의가 절로 피어오르기 때문이지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손꼽히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 수군을 이끄는 진린 장군 덕분에 이순신 장군과 자연스런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두사충은 이순신 장군과 전략을 논의하며 친분을 쌓았습니다. 이순신이 두사충에게 보낸 시를 보면 민족을 초월한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이러한 인연은 세교(世交, 세대간 이어져 오는 친분)로 이어져 이순신의 7대손인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사령관) 이인수(李仁秀, 1737~1813)가 두사충을 위한 신도비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의 우정 이야기를 통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진정한 우정’이란 무엇인지 그 참된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도 두 사람이 전하고 싶은 또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요?
조상을빛내는 효
어느 추운 겨울날,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몸져누운 어머니를 간호하는데 여념이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송이버섯죽이 먹고 싶다고 하시는 거예요. 엄동설한에 어디 가서 송이버섯을 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아들은 차마 어머니께 버섯이 없다는 소리를 하지 못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을 뒷산에 올랐습니다. 나무 밑을 샅샅이 뒤져가며 버섯을 찾기 시작했어요. 얼마나 산을 헤맸을까. 아들의 정성에 감복하여 하늘이 선물을 내렸는지, 눈 덮인 큰 소나무 밑에서 버섯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버섯을 품안에 넣고 한 걸음에 달려가 어머니께 버섯죽을 끓여드렸어요. 그토록 먹고 싶어 하시던 버섯죽을 드신 후, 어머니가 점차 원기를 회복하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이 아름다운 효행 이야기는 바로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杜漢弼,1823~1893)의 이야기입니다.
모명재 서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담한 효자각이 바로 ‘명정각(命旌閣)’으로 두한필의 효행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조정에서 내린 ‘정려(旌閭, 충신·효자·열녀 등이 사는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입니다. 두한필이 세상을 떠난 후, 조정에서는 이 같은 정려와 함께 종3품(從三品)에 해당하는 ‘통훈대부 규장각직각(通訓大夫 奎章閣直閣)’이란 벼슬을 증직(贈職, 충신·효자·학식이 높은 사람 등에게 죽은 뒤에 품계, 관명 등을 높여주는 일)하고 그의 효행을 기렸습니다.
현재 명정각은 1912년 두사충의 재실인 모명재를 지을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1966년에 보수하였으며, 정려각 안에는 정려비와 작은 편액 5개가 걸려 있습니다.비록 작은 정려각만이 그의 효행을 전하고 있지만 두한필은 두사충의 자랑스런 후손이며 아름다운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명재길 나무이야기
배롱나무
꽃이 백일동안 피고 지어 백일홍이라고도 불리며 꽃말은 ‘떠나는 벗을 그리워하다’로 묘지에 잘 어울리는 나무입니다. 또한 나무껍질이 얇아 속이 비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삿된 생각을 하지 않고 청렴하게 살겠다는 선비들이 삶의 자세를 상징한다하여 향교나 서원에 많이 심기도 했습니다. 중국이 원산지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은 이 땅의 흙이 되었지만 중국에 뿌리를 둔 배롱나무가 그를 한껏 끌어안으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고 있습니다.나라는 망해도 산천은 남아 있어 성에는 봄이라고 초목이 우거졌구나 시절을 느꺼워하니 꽃에도 눈물이 흐르고 이별을 한스러워하니 새소리에도 마음 놀란다 _두보[춘망]
소나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는 육송으로 줄기 윗부분이 붉은 색을 띤다하여 적송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소나무는 적송 이외에 곰솔, 리기다소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있는데요, 곰솔은 마치 곰털처럼 잎이 뻣뻣하고 염분에 잘 견디어 해안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 입니다. 리기다소나무는 잎이 달라 다른 종과 쉽게 구분되는데, 일반적인 솔잎은 2가닥인데 리기다소나무는 잎이 3가닥입니다. 형봉건강쉼터에는 육송, 곰솔, 리기다소나무를 모두 볼 수 있습니다. 형제봉 푸른 안식처에 몸을 맡기고 소나무의 이름을 맞춰 보세요. 본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조화를 이루고 있는 나무의 모습에서 소중한 삶의 지혜를 배워보시기 바랍니다.
상수리나무
참나무과에 속하며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이 6종류를 참나무 6형제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중에서도 크고 좋은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가 바로 상수리나무로 6형제 중 맏형이라고 볼 수 있지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난 생활을 할 때, 반찬이 없어 상수리나무 도토리로 만든 도토리묵이 상에 올랐는데, 그 맛이 별미라 왜란이 끝난 다음에도 항상(常) 수라상에 오른다하여 ‘상수라’로 불리다가 나중에 ‘상수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수리나무는 그 이름처럼 용도와 쓰임이 다양한 나무로 늘 우리 곁에 있는 친구 같은 나무입니다.
이팝나무
물푸레나무과로 꽃은 벚꽃보다 이른 5월에 핍니다. 그 모양이 밥알을 닮아서 일시에 화려하게 피면 풍년이 들고 잘 피지 않으면 가뭄이 심한 해라고 하여 한 해 농사를 가늠하는 기상목(氣象木)으로 우리 선조들은 이팝나무를 귀하여 여겼습니다. 한편 입하 무렵에 꽃이 핀다하여 입하목(立夏木)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실제 입하가 다가오면 모내기를 준비하니 이 이야기가 그저 설(說)만은 아닌 듯합니다.고모동에 위치한 이 노거수 이팝나무는 수령이 300년으로 추정되며 4그루가 함께 자라고 있어 꽃이 필 때 신록의 나뭇잎에 흰 눈이 쌓인 것처럼 장관을 이룹니다.
중국 명나라 두릉(杜陵) 사람, 두사충(杜師忠).두사충은 시성(詩聖) 두보의 후손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조선에 원군 온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였습니다. 지세를 살펴 진지를 삼을 만한 좋은 터를 잡는 일이 그의 임무로 그는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였어요.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가 왜 한국의 역사가 되어 한국인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역사 속 두사충과 조우하며 모명재길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볼까요!
명풍수(名風水), 조선에 오다
때는 1592년 임진년, 한양 봉수대에 연기가 활활 피어올랐습니다.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임진왜란 발발.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왜군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명나라 장군 이여송은 그의 일급 참모이자 풍수전략가인 두사충과 함께 조선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1593년, 조선의 관군과 의병, 이여송과 두사충이 이끄는 명나라 연합군은 왜군을 격파하며 평양성을 탈환하였습니다. 그러나 승전의 기쁨도 잠시, 벽제관(경기도 고양시) 전투에서 왜군에 대파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어요. 패전의 모든 책임이 진지의 위치를 잡는 임무를 맡은 두사충에게 돌아갔습니다.“두사충을 참수하라!”그러나 참패의 원인이 진지의 위치가 아니라 병사들의 사기 문제였다는 우의정 정탁(鄭琢, 1526~1605) 등 조선 대신들의 구명운동으로 두사충은 간신히 그 책임을 모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조선에서 다시 태어난 두사충. 전쟁이 끝나고 명나라로 돌아가는 길, 알 수 없는 기분이 두사충을 감싸 안았고 그는 조선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습니다.
두사충, 대구에 뿌리를 내리다
1598년,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고 7년간의 전쟁도 끝이 났습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보면서 두사충은 직감할 수 있었어요. 바람 앞의 등불은 ‘조선’이 아닌 바로 ‘명나라’라는 것을. 명(明)이 기울고 청(靑)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두사충은 청의 신하가 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조선 사람이 될지언정 오랑캐 백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전쟁이 끝나자 두사충은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합니다. 그리고 대구 땅에 터를 잡게 되지요. 그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두고 왜 대구에 정착을 했을까요?조선 조정에서는 귀화한 두사충을 극진히 대우하며 그가 원하는 곳에 살게 해 주었습니다. 두 번의 전쟁에 모두 출전하여 공을 세운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가 조선에서 살겠다하니 그럴 만도 했지요. 조선의 산세와 지세를 훤히 꿰뚫고 있던 두사충은 오래 전부터 대구를 마음에 둔 터였어요. 그가 대구에서 처음 정착한 곳은 지금의 경상감영공원자리입니다. 그자리는 ‘하루에 천냥이 나오는 명당’으로 오늘날 대구의 상업중심지가 되었으니 그의 풍수가 신통방통하게 들어맞은 셈이지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이 경상감영(경상도를 관할하던 관청) 부지로 결정되자 두사충은 나라를 위해 그 땅을 흔쾌히 내어 놓습니다.
그의 갸륵한 마음에 감동한 조정은 지금의 계산동 땅을 하사하였으나 이 땅마저도 추위에 떠는 백성들의 의복을 해결하기 위해 뽕나무를 심고 가꾸게 했습니다. 계산동 일대를 뽕나무 골목으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지요. 경상감영공원, 계산동 뽕나무 골목 이외에도 두사충은 대구 곳곳의 역사와 이야기가 되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국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두사충이 대구에 자리를 잡은 지도 어느덧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두사충 마음에 늘 자리하고 있었지요. 그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대덕산(앞산)을 올랐습니다. 산에 올라 고향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어요.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리움이 한없이 메아리치자 두사충은 아예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와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붙이고, 제단을 쌓아 매달 초하루 관복을 입고 황제가 살던 북쪽을 향하여 배례를 올렸습니다. 또한 호를 ‘명을 그리워한다’는 뜻에서 ‘모명(慕明)’으로 바꾸었어요. 두사충이 배례를 올렸던 대덕산 일대는 현재까지 ‘대명동(大明洞)’이라 불리며, 대명동은 11동까지 있는 대구에서 면적이 가장 큰 동이 되었습니다. 평생 풍수를 연구한 두사충의 안목이 느껴지는 부분이지요.그는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답게 조선 팔도를 유람하며 풍수이론을 갈고 다듬은 ‘모명유결(慕明遺訣)’이란 풍수서를 펴냈습니다. 지금도 이 책은 풍수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교과서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흙이 되어
어느덧 죽음을 예감한 두사충.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묘터를 스스로 점지해둔 터였습니다.그가 미리 보아둔 대구 최고의 명당은 어디일까요?그러나 자신이 누울 자리를 찾아서 형제봉 앞을 지나던 중 그만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 바람에 두사충이 묻히고자 했던 자리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지요. 그 자리가 지금의 고산지역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그의 묘는 모명재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후손인 두릉두씨(杜陵杜氏) 역시 지금까지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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