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제일관문
위치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팔현길 248(만촌동)(☏ 070-8230-4272)
우리민족은 고래(古來)로 구릉과 산성을 방수(防守) 의 요충으로 중시하여 각종 성(城)을 쌓았으나 평지에 성을 축조하는 것은 드물었다. 지방행정관서가 있는 곳의 평지에 축성된 대구 읍성(邑城)은 1590년(선조23년)에 처음 만들 때는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었으 나,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뒤 1736년(영조 12)에 돌로 다시 쌓아 석성(石城)으로 만들었다. 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정문을 두었는데, 동문은 진동문(鎭東門), 서문은 달서문(達西門), 남문은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북문은 공북문(拱北門)이라 하였다. 1906년 읍성이 철거될 때 성문들도 함께 철거되었다. 현재의 영남제일관은 1980년에 그 자리를 옮겨 새로 세웠으나 성루(城樓)의 위치·규모·품격 면에서 원형과 동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영남제일관터와 표지석>
①읍성의 축조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구릉과 산에 산성을 많이 건축하였는데 이들 산성은 군사적 목적으로 축조된 성이다. 반면, 평지와 산기슭 주변에 축조된 읍성은 행정과 군사 두 가지 모두 수행했는데 평화시에는 주로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대구에도 팔공산에 가산산성이, 분지 중앙에는 대구 읍성이 있었다.
1601년 경상도 감영이 안동에서 대구로 이전되면서, 감영의 위상을 갖추기 위해 읍성의 축성이 시도되었으며 영조 12년, 관찰사 민응수에 의해 비로소 성이 축성되었다.
이들 문의 대략적 위치는, 4대문 중 중심문인 남문은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라 하여 현재의 약전 골목 대남 한의원 네거리에 있었고, 서문은 달서문(達西門)이라 하여, 현 금호호텔 뒤쪽에 있는 조흥은행 서성로 지점에 있었다. 북문은 공북문(拱北門)이라 불렀으며, 현재의 북성로 경북 소방설비 네거리에, 동문은 진동문(鎭東門)이라 불렀으며, 현재 동아백화점 서쪽의 동성로 제일 은행 대구지점 네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축성된 대구 읍성은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성이 파괴될 당시 성벽과 성루가 모두 없어져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남문이었던 영남제일관만을 1980년 수성구 망우공원 내의 인터불고 호텔 뒤쪽에 복원해 놓았다.
영영축성비 (嶺營築城碑)
종별 및 지정번호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소 재 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팔현길 248 (만촌동)(영남제일관 광장)
지정년월일 : 1974.12.10
이 비(碑)는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대구읍성을 쌓은 뒤, 그 규모와 공사과정을 기록하여 1737년(영조 13)에 세운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공사기간은 1736년 1월부터 시작하여 6개월 정도 걸렸으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이른다고 한다. 성의 둘레는 총 2,124보(步) 성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에게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한 담인 여첩(女堞)이 819첩, 성높이는 서남이 18척, 남북이 17척, 뒤 축대의 넓이가 7보, 높이가 3급(級)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구읍성은 원래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이 때 비로소 돌로 쌓아 석성(石城)으로 만들었다 한다.
이 비는 원래 남문(嶺南第一關)밖에 세웠는데 1906년(광무 10) 당시 대구군수인 박중양(朴重陽)이 성을 헐어 버렸고, 이 비는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다 1980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비문은 민응수가 짓고, 글씨는 백상휘(白常輝)가 썼다.
대구부 수성비 (大邱府 修城碑)
종별 및 지정번호 : 대구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5호
소재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팔현길 248 (만촌동) (영남제일관 광장)
지정년월일 : 1979.1.25
이 비는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김세호(金世鎬)가 경상감영의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뒤, 그 사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1870년(고종 7) 봄에 수리를 시작하여 그 해 11월에 마쳤는데, 원래 보다 높이와 크기를 키워서 동서남북의 성벽(城壁) 위에 새로이 4개의 누각(樓閣)을 세웠다는 것이다.
누각의 이름은 동을 정해루(定海樓), 서를 주승루(籌勝樓), 남을 선은루(宣恩樓), 북을 망경루(望京樓)라 하였다고 한다.
당초 이 비는 대구읍성의 남문 밖에 세워진 것이었으나, 1906년(광무 10) 대구부성이 헐리면서 한곳에 자리잡지 못하다가 1932년 대구향교로 옮겼다. 그런 뒤 1980년 남문[嶺南第一關]을 다시 세우면서 비석도 이 자리로 옮겼다.
비문은 관찰사 김세호가 지었고, 글씨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최석로(崔錫魯)가 썼다.
곽재우에 대해서-☆
조선시대의 항일의병이다. 붉은 옷을 입고 다녀서 홍의장군이라고 불렸다. 곽재우장군은 계속 붉은 옷을 입고 전투에 임하여서 나중에는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수하들에게 붉은 옷을 입히고 곳곳에서 전투를 벌여서 왜놈을 혼란에 빠뜨렸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왕실은 그런 곽재우의 강력한 힘이 조선을 지탱하는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여, 곽재우 장군을 없애려 했다. 하지만 결국 풀려나고, 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사전에서…
1552년에 태어나 1585년(선조 18)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파방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로 피난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592년 5월 함안군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홍의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왜적을 피해 달아났던 감찰사 김수와의 불화로 누명을 쓰고 구금되었다가 초유사 김성일의 장계로 석방된 후, 유곡도찰방·조방장·성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좌도방어사로 임명되어 화왕산성을 수비하였고, 경상우도조방장이 되어 영창대군을 신구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수군통제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는데, 그 후 부총관·한성부좌윤을 거쳐 함경도관찰사를 지내다가 당쟁으로 나라의 형편이 날로 어지러워질 뿐만 아니라, 통제사 이순신이 죄없이 잡혀 올라오고 또 절친한 사이인 광주의병장 김덕령이 이몽학의 난에 휘말려 죽은 일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창암에 망우정을 짓고 은둔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필체가 활달하고 시문에도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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